감은사(感恩寺)
원래는 문무왕이 불법(佛法)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진호국가(鎭護國家) 사상에서 따온 진국사(鎭國寺)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완료되기 전에 문무왕이 승하했다. 이후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이어 완성시켰고 부왕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의미에서 감은사라 하였다.
문무왕은 승하하기전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겠다는 유지를 남겼고 그 흔적이 현재의 대왕암이다.
다만, 산골처냐 장골처냐 하는 논란이 있다.
왜냐면 경주 낭산(남산과 다르다. 산세가 이리를 닮았다하여 이리 '낭'자를 쓴다)에 있는 능지탑이 문무왕의 화장지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왕암이 현재 두곳이다.
경주 봉길해수욕장 앞에 있는 문무대왕릉 (대왕암), 울산에 있는 대왕암.
사적158호로 지정된 것이 경주 봉길해수욕장 앞에 있는 문무대왕릉이고 울산에 있는 것은 문무왕의 왕비 자의왕후의 무덤이라는 썰... 그냥 전설처럼 지금껏 이어져 오고있다.
자의왕후도 남편인 문무왕을 따라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고 한다.
이것 저것 다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그분들의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는 큰 마음은 작금의 누구와 상당히 비교가 된다.
감은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석탑과 사리구이다. 사리구는 별도로 다루고 이번 블로그에서는 탑만 다루려 한다.
감은사의 석탑은 당시 신라의 힘을 보여준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양식과 함께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자신감과 기상이 탑에서 읽어진다.
남성적이고 매우 시원시원한 느낌을 준다. 규모 또한 장대하다.
화려한 장엄없이 신라석탑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층의 기단과 3층의 옥신석, 늠름한 찰주.
신라의 기념비적 석탑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비슷한 규모의 석탑으로 고선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에 비해 여성스러운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탑으로 경주국립박물관에 있다. 원래 있던 곳이 덕동호를 만들면서 수몰이 될 곳이어서 지금의 박물관 자리로 옮겼다.
감은사지는 가람배치 또한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준다.
평지가람에서 보이던 1탑 3금당의 가람배치에서 산지가람으로 옮겨가며 쌍탑 1금당의 가람배치를 보여주며 이는 이후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가람배치가 된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묘법연화경 견보탑품에 등장하는 이불병좌와 관계가 있는것으로 보이며 이를 가장 잘 묘사한 것이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화강암을 이용하여 어찌저리도 세밀한 조각을 하였을까?
지금의 기계로 가공한 것이 저만 못한 것은 무엇때문인가?
사랑을 예감하다.
2002년 월드컵이 열렸던 그해 12월 어느 밤.
난 한 여인과 이곳에 왔었다. 실제론 한 명 더 있었다. 둘다 여후배였다.
그 여인만 데려오는게 모양새가 이상해서 같이 가자고 했다. ㅡㅡ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저렇게 소심하고, 순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ㅋㅋ
그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은은한 달빛인 비춰주는 탑을 바라보며 이것 저것 설명만 해주었다.
다만, 그 여인은 나의 숨겨온 마음을 그때 느꼈다고는 했다.
오랫동안 감춰왔던 마음들을 이후에 고백을 하며 밝혔고 우리 둘에게 이곳은 늘 사랑의 시작이랄까... 그런 곳이다.
해서 가끔씩 찾아가기도 한다.
감은사가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이유.